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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슬람 이야기] 하기아 소피아(아야소피야) 성당/박물관/모스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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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첫 번째 이야기 부록에 이어 이번에는 본론 2번째 이야기로 가보자.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동서로마 교회가 맞파문했다는 데에서 글을 마쳤다.

부록에서 언급했듯, 특사단이 동로마에 간 때는 1054년 7월인데, 특사단을 보낸 교황 레오 9세는 4월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특사단의 특사 효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파문이 상대 교회를 향해 한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한 것이기 때문에 동서로마 교회가 공식 이혼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파문보다 더 심한 일이 일어난다. 이른바 제4차 십자군 전쟁이다. 이 전쟁의 배경을 먼저 좀 살펴보자.

십자군이라 하면 그리스도교 서유럽이 무슬림 손에 들어간 예루살렘을 찾겠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병한 전쟁이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심판하시리라”고 호기 좋게 훔베르투스 추기경이 케룰라리오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수퍼 빅 엿’을 멕이고 줄행랑친 때가 1054년.

그로부터 딱 41년이 지난 1095년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재위 1088-1099, Urbanus II)는 동로마황제 콤네노스(재위 1081-1118, Alexios Komnenos)의 요청을 받고 프랑스 끌레르몽(Clermont) 공의회에서 예루살렘 수복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 유명한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는 말이 이 때 나왔다고 하는데 교황이 직접 말했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그나저나 하느님 바쁘시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 제대에 놓인 문건을 읽고 심판하시랴, 전쟁도 하시랴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자. 예루살렘이 무슬림 손에 들어 간 때는 637년 또는 638년이다. 우르바누스 2세가 전쟁을 선포한 때보다 무려 450년 전이다. 그런데 그동안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더군다나 그리스도교 성지를 무슬림들이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하고 있었는데?

콤네노스 동로마 황제가 서로마의 도움이 필요했던 이유는 신흥 강자 셀축 튀르크(Selçuk Türk) 때문이었다. 보통 셀죽(Seljuk)이라고 하는데 셀축이 맞는 말이라 이 용어를 계속 고집스럽게 쓸 거다.

셀축은 중앙아시아에서 중동으로 치고 내려온 무슬림인데 튀르크어 사용 유목부족이다. 셀축의 등장은 이슬람 역사에서 너무너무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다.

우선 아랍어, 페르시아어가 주류였던 이슬람문화권에 튀르크어라는 제3의 언어가 등장하는 계기다.

나는 수업 시간에 이슬람 1400년사를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 아랍인의 종교, 페르시아인의 문화, 튀르크인의 무력. 아랍인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가져왔고, 페르시아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여 문화를 창출하였으며, 튀르크인들은 페르시아문화 이슬람에 푹 빠져 땅을 넓혔다.

아랍의 문화가 뛰어나다고 주장하며 페르시아나 튀르크의 역할을 크게 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페르시아 문화 이슬람이 손을 못 뻗친 맘룩 이집트는 인정.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길을 죄다 살펴보자.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세계최초의 아랍어문법책을 쓴 사람(시바와이히), 이슬람 세계 최고의 역사책을 쓴 사람(앗따바리), 수피영성의 대가(알가잘리), 의학의 대가(이븐 시나)는 물론 예언자 하디스를 묶은 하디스 전승자들(넘나 많음)의 모어가 무엇이었나? 페르시아어(파르시 Farsi)!!!

페르시아는 이슬람 이전부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곳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 최근 메리 보이스(Mary Boyce)의 조로아스터교 책이 번역되어 나왔으니, 읽으면 이슬람 이전 페르시아 종교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듯(메리 보이스 지음, 공원국 옮김, «조로아스터교의 역사», 민음사, 2020). 아주 오래전 졸고도 쪽팔리지만 슬쩍 알려 드림다(박현도, “페르시아의 역사와 종교 문화", 국립제주박물관 편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11-30쪽, 서경문화사, 2008).

튀르크어를 쓰는 사람들은 어쩌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우리와 같은 조상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언어적 유사성 때문에 우랄알타이어라고 부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화되고 여러 층의 언어가 섞여 사실 현대 터키어와 우리말은 신체나 가족, 자연 관련 기본 단어가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암튼, 어찌되었든 간에 튀르크인들은 몽골지역에서 발흥하여 서쪽으로 유목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여 다녔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들의 용맹함을 높이 사서 압바스조 칼리파 알무으타심(재위 833-842, al-Mu‘tasim) 시기에 용병으로 고용되어 무슬림 세계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쌈 잘하지, 충성스럽지, 근위부대로 두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흐흐흐, 그런데 그러다 아작 났지....

셀축 튀르크는 동로마제국의 거점 아나톨리아반도로 치고 들어왔다. 1071년 만지케르트(Manzikert). 현대 터키어 지명 말라즈기르트(Malazgirt). 아나톨리아 동쪽 끝에서 셀축 튀르크 알프 아르슬란(재위 1063-1072, Alp Arslan)은 로마노스 4세(재위 1068-1071, Romanos IV)가 이끄는 동로마군을 무찔렀다.

여기서 잠시...현대자동차에서 만든 판매실패작 아슬란(Aslan)이 바로 아르슬란(Arslan)이다. 사자라는 말이다. 알프 아르슬란은 “영웅 사자”라는 뜻이다.

알프 아르슬란은 원래 싸울 마음이 없어서 평화안을 제시하였는데 거절당하는 바람에 싸움에 임하였다. 로마노스 4세는 띨빵하게 포로로 잡혔고, 알프 아르슬란은 끌려온 로마노스의 목을 발로 한번 눌러주고는 왕으로 잘 대접한 후 배상금과 조약을 챙기고 풀어줬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승리한 셀축 튀르크는 그보다 16년 전인 1055년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하였다. 셀축 튀르크의 중동 출현은 튀르크어를 이슬람 세계의 주류 언어 중 하나로 소개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중동을 휘어잡던 시아파를 장악하고 순니 이슬람 세계를 복원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슬람역사에서 10세기는 시아의 시대였다. 압바스조는 이란에서 발흥한 12이맘 시아파 부예(Buye)조에 수도 바그다드를 945년에 내주고 허수아비로 빌빌거렸고, 이집트는 969년에 7이맘 시아파 파티마(Fatima)조가 접수하였다. 이들이 만든 신도시가 카이로다. 순니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유명한 알아즈하르도 이들 시아가 만들었다.

이러한 시아의 시대를 깨끗이 정리한 자들이 바로 순니파 튀르크인들이었고, 그 시작이 셀축 튀르크다. 순니챔피온(Sunni Champion)!

게다가 아나톨리아반도에 오늘날 터키를 자리잡게 만든 일등 공신도 셀축 튀르크다.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다시 만든 에르도안 대통령의 꿈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승리 1000년이 되는 2071년까지 터키를 다시 세속주의에서 이슬람으로 돌려놓는 것. 해마다 8월 26일에 승전을 기념한다. 작년에 948주년 기념식을 했다....

이래저래 셀축 튀르크는 여전히 지금도 살아 숨 쉰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의 무슬림 영웅 살라훗딘(Salah al-Din, 살라딘)도 셀축 튀르크 장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