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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중동은 축구다] 북아프리카 축구의 문화사 5 - 아랍에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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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전 숭실대 문창과 교수/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UAE 축구는 꾸준함의 대명사다. 1980년부터 참가한 아시안컵에서 2000년 단 한 번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본선에 올랐다. 2019년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자동 진출한 것을 포함하면, 11회 출전해서 10번이나 본선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중동의 신사’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얻었다. 편법이나 시간 끌기 등이 없는 ‘클린 풋볼’이 UAE의 트레이드마크다.

UAE 축구를 지탱하는 뼈대는 탄탄한 자국 리그다. UAE 리그는 1973년 14개 팀으로 출범하여 아직까지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UAE는 중동에서 가장 먼저 리그 시스템을 만든 나라 가운데 하나다. 걸프전 때문에 1990/91 시즌이 중단된 것을 제외하면 매해 모든 경기가 차질없이 열렸다. UAE 리그는 중국, 카타르, 한국 K리그에 이어 AFC 리그 랭킹 4위를 유지하고 있을 만큼 탄탄한 리그다. AFC 리그 랭킹은 각 나라 대표팀의 FIFA 랭킹(10% 반영), 각국 프로팀들의 아시아 클럽대회 성적, 리그의 재정상태 등을 반영하여 AFC가 상정하고 공지한다. AFC리그 랭킹에 따라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이 차등 배분되기에, 각 나라 협회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관리하는 지수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구조적인 개선 없이는 이 랭킹을 단번에 끌어올린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참고로 AFC 리그 랭킹 5위는 이란리그, 6위가 일본의 J리그, 7위가 사우디아라비아 리그다.

UAE 리그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팀은 1945년에 창단한 알 나스르다. 그 밖에도, 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많은 팀들이 1960년대에 창단되었다. 이들을 한데 묶어 1973년부터 아마추어 리그로 개편하고 세미프로 리그를 거쳐 완전한 프로화를 이룩한 것은 2007년부터다. 이 해에 ‘UAE 프로축구 위원회’를 만들었고, 이듬해 명실상부한 프로연맹을 발족했다.

그렇다면 24년 동안 UAE 축구협회는 어떤 일을 했는가? UAE 리그가 대표팀 랭킹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어떤 점이 뛰어나다는 것인가.

첫째, 리그 결성 후 24년이 지나서 프로화를 도모한 것은 축구를 산업으로 보고 접근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무작정 돈을 쓰는 구조가 아니라, ‘구단 운영비를 벌며 자체 생존력을 기르는 방안’을 연구하며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린 결과다. ‘대표팀 성적만 좋다면, 얼마든지 적자가 나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은 적어도 UAE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구단주의 호의가 끊어지면 당장의 유지 존속을 걱정해야 하는 구단이 전 세계에 즐비하다. UAE 리그 팀들은 다르다. 중동 각국 리그에 선수와 지도자를 적극적으로 수입 수출하며 비즈니스를 한다. 한국과도 연계가 있다. UAE 리그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는 2018년 현재 2명.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북한과의 결승전에서 연장 직전 결승골을 터뜨린 임창우, 2012년 런던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이자 독도세레머니로 유명한 박종우가 그 면면이다. 전 국가대표 이명주와 신진호도 한때 UAE 리그에서 멋진 활약을 펼쳤다.

UAE 리그는 명칭도 판매한다. 후원하는 통신사 이름을 붙여 2008년부터 2012년까지는 에티살랏 프로리그로 불렸고, 2013년부터는 중동 각국 의 축구팬들과 시청자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UAE 아라비안 걸프리그(UAE Ararbian Gulf League)로 명칭을 바꾸었다.

UAE 아라비안 걸프리그의 특징은 몇 가지가 더 있다. 중동에는 한 경기장을 여러 구단이 나누어 쓰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경기장은 ‘홈 구장’이기보다는 ‘경기가 열리는 장소’의 의미가 더 강하다. 팬들의 충성심과 소속감을 불러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내 팀의 우리 경기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UAE는 다르다. 모든 구단이 각자의 홈구장을 가지고 철저한 홈앤드어웨이로 리그를 운영한다. ‘우리 경기장’에서는 오직 ‘우리 팀’의 경기만 열린다. 1974년에 창단한 알 자지라 구단의 (‘알 자지라 방송’의 마로 그 알 자지라다.) 42,000명을 수용하는 스타디움이 가장 크고, 두 서너 구단이 소유한 5,000석 정도 실용적 사이즈의 경기장이 최소 규모다.

UAE 아라비안 걸프리그가 신경을 쓰는 사항이 하나 더 있다. U21 리그, 즉 21세 이하의 선수들만 참가하는 별도의 리그를 운영한다는 점이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나 한국의 K리그도 2군리그 격인 리저브 경기나 유소년 리그를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하지만, R리그나 유소년리그가 별도의 상품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1군을 지원하기 위한 예비 및 미래자원을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펼치는 경기다. 하지만 UAE 아라비안 걸프리그는 U21리그 자체를 상품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미디어노출, 기록관리 등을 1군리그 못지않게 지원하고 있다. 선수의 수출 및 수입과 관련하여 중동의 바이어들에게 ‘견본시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중동 여러 나라 구단이 이곳에 유망주를 보내고 경기력을 테스트하기도 한다. 연습경기보다는 보다 실전에 가까운 경기에서 거둔 성적이 선수를 평가하는 데이터로서 훨씬 더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UAE U21리그는 그래서 그 자체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하나의 거대한 실험장이다.

UAE 축구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둘이다. 하나는 1996년 아시안컵 준우승이다. 자국에서 개최한 대회에서 UAE가 맞이한 첫 상대는 전통의 강자 대한민국.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황선홍에게 전반 9분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40분 K 사드의 동점골로 1-1 무승부. 2차전에서는 쿠웨이트에게 0-2로 끌려가다 53, 55, 80분의 연속골로 3-2 역전승. 3차전은 인도네시아에게 2-0으로 완승하며 8강 진출. 같은 조에서 8강에 오른 한국은 이란에게 2-6으로 대패하며 탈락했지만, UAE는 연장 접전 끝에 109분에 터진 우사인의 골로 난적 이라크를 1-0으로 불리치며 4강에 오른다. 준결승 상대 쿠웨이트는 1-0으로 돌파. UAE가 AFC 주관 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건 이때가 최초다. 결승 상대는 84년 대회부터 4회 연속 결승에 오른 사우디아라비아. 연장 포함 120분 동안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왕좌의 게임’은 승부차기 4-2, 사우디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UAE 축구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빛나는 순간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다. 아직까지는 UAE의 유일한 본선 참가 기록이다. 이 대회의 아시아 예선은 처음부터 화제거리가 많았다. 1차 예선에서 이라크카 오만과 비겨 3승2무1패의 성적으로 3승3무의 카타르에게 뒤지며 탈락했고 절대강자 이란은 방글라데시, 태국 등이 속한 조에서 중국과 5승1패 동률을 기록했지만 골득실에서 밀려 역시 최종 예선에 오르지 못했다. 중국은 13득점 3실점, 이란은 12득점 5실점. 일본은 인도네시아, 홍콩이 속한 조에서 북한에 이어 조2위를 기록하며 탈락. 북한은 4년 전 일본에게 밀려 1차 예선에서 탈락한 아픔을 그대로 되갚았다. UAE의 1차 예선 상대는 쿠웨이트와 파키스탄. 남예맨이 국내 사정으로 막판 기권한 것이 UAE의 최종라운드 진출에 기여했다. 1989년 1월 13일 쿠웨이트와의 원정경기는 2-3으로 졌지만 2월 3일 홈경기는 1-0으로 승리. 그 경기로 쿠웨이트는 3승1패 6득점 3실점으로 일정을 마쳤다. 2월10일 2승1패 8득점 3실점의 성적을 안고 이슬라마바드로 원정을 떠난 UAE 대표팀은 최종전 파키스탄 전을 이기기만 하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한다는 것을 경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경우의 수’를 미리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많다. 남예맨의 불참으로 같은 조 3팀 중 한 팀은 일정을 미리 마칠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이 UAE에게 다소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는 뜻이다. 물론 UAE는 파키스탄과의 원정경기를 4-1 승리로 장식하며 당당하게 실력으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최종예선은 10월 12일부터 28일까지 6개국이 싱가포르에 모여 3일에 한 번씩 돌아가며 격돌했다. 풀리그로 5경기를 치르는 격전. 상위 두 팀만 이탈리아에 갈 수 있는 쉽지 않은 관문이었다. UAE는 12일 대회 개막 경기이자 자신들의 첫 경기를 북한과 0-0으로 비긴다. 17일 중국에게 2-1로 승리하며 1승1무로 조 선두. 21일에 열린 다음 경기는 사우디와 0-0, 24일에는 카타르와 1-1. 모든 팀이 한 경기만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3승1무의 한국은 일찌감치 본선행 확정. 사우디는 최종전 결과에 관게없이 탈락 확정. 나머지 4팀은 다른 팀들의 경기 결과에 따라 모두 본선행이 가능한 복잡한 상황이었다.

대한민국 3승1무 승점 6점 4득점 0실점 +4

UAE 1승3무 승점 5점 3득점 2실점 +1

중국 2승2패 승점 4점 4득점 4실점 0

북한 1승1무2패 승점 3점 2득점 2실점 0

카타르 3무1패 승점 3점 2득점 4실점 –2

사우디 2무2패 승점 2점 2득점 5실점 –3

10월 28일 동시에킥오프한 세 경기는

한국 대 UAE

사우디 대 북한

카타르 대 중국

이었다. 한국이 UAE를 이긴다면, 모든 팀들에게 찬스가 있다. 이 경우, 중국은 카타르에게 이기면 무조건 본선행이다. 중국이 지거나 비기거나 혹은 카타르가 2골차 이상으로 중국을 이기지 못하면 북한은 사우디를 이기는 것만으로 본선에 간다. 북한이 사우디와 비기면 어떤 경우든 예선 탈락이다. 한국이 UAE와 비겨도 중국은 카타르를 이기기만 하면 무조건 본선에 간다.

상황이 이렇듯 복잡했기에,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이회택 감독에게 모든 나라의 기자들이 날선 질문을 던졌다. 핵심은 ‘본선 진출을 확정했으니 마지막 경기를 주전 선수들을 빼고 느슨하게 운영할 예정이냐’는 것. ‘어느 팀이 본선에 오를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도 이어졌다. 이회택 감독은 “나는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 본선에는 가장 실력이 좋은 팀이 올라올 것”이라며 단호하게 잘랐다.

한국은 전반 9분 황보관의 오른발 슛으로 1-0으로 달아났다. UAE는 16분 크로스를 보고 달려나오는 한국 골키퍼 김풍주의 머리 위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재치있는 헤드업으로 1-1을 만들었다. 1차 예선부터 30득점 무실점을 기록 중이던 한국 골문이 처음으로 열리는 순간이었다. 다른 중동 팀도 결과적으로 UAE를 도왔다. 두 경기의 결과는

사우디 2-0 북한

카타르 2-1 중국

만약 중국이 카타르를 이겼다면 승점 6점 동률 다득점 우선 원칙에 의해 UAE가 아니라 중국이 본선에 나갔을 것이다. UAE는 최종예선 5경기에서 단 한 번만 승리하고도, 딱 4골만 득점하고도, 그러나 단 한 경기도 지지 않았기에 1승4무 조 2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감격에 겨워 국기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싱가포르의 경기장을 뛰어다니던 UAE 선수들의 표정은 1990년 아시아 예선을 마무리하는 명장면 중의 하나다.

UAE의 역사적인 월드컵 데뷔전은 1990년 6월 9일 볼로냐에서 열린 콜롬비아 전이다. 무려 28년 만에 본선 무대에 복귀했지만,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 발 데 라마와 괴짜 골키퍼 아귀타를 앞세운 만만치 않은 팀이었다. 펠레가 대회 개막 전 우승후보로 콜롬비아를 꼽았을 정도였다. 마침내 경기 시작, UAE는 초반부터 실수가 많았다. 기본적인 키핑이나 트레핑 미스였다. 선수들의 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본선 첫 경기라는 중압감과 경험부족이 불러오는 ‘정상적인 현상’이었다. 상당히 밀리면서도 0-0으로 버티던 UAE는 선취골 찬스를 아쉽게 날린다. 전반 종료 직전 수비수 에스코바르(94년 대회 대 미국 전에서 자책골을 넣고 고국에 돌아가 살해당한 비운의 주인공)의 백패스를 알리 타니 쥬마가 가로채 회심의 슛을 날렸으나 아귀타의 선방에 막혔고, 골키퍼를 맞고 튀어나온 공을 재차 슛으로 연결했지만 이번에는 간발의 차로 골문을 빗나갔다. 50분 UAE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고 알바레즈가 오른편 깊숙한 지역까지비교적 편안하게 전진한 뒤 올려준 크로스를 헤딘이 깔끔하게 머리로 받아넣으며 콜롬비아가 1-0으로 앞서 나갔다. UAE도 동점골 찬스를 만들었다. 전진하는 콜롬비아 수비진 뒷공간으로 기가 막힌 패스가 배달되었고 아드난 알 탈랴니가 공을 향해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하지만 페널티박스 바깥까지 달려나온 아귀타의 발이 살짝 더 빨랐다. 아귀타가 이 공을 걷어내며 스코어는 여전히 1-0.

종료 3분 전, 최종 수비수까지 하프라인을 넘어서며 총공세를 취한 UAE의 전진 패스를 차단한 콜롬비아가 최전방의 발 데 라마에게 공을 연결했다. 특유의 붉은색 갈기머리를 휘날리며 UAE 진영을 가로질러 간 당시 프랑스리그 몽펠리에 소속의 공격수는 자신의 명성에 어울리는 깔끔한 대각선 땅볼슛으로 2-0을 만들었다.

UAE의 다음 상대는 6월 15일 밀란에서 맞이한 서독. 90년 월드컵은 전차군단이 ‘서독’이라는 국명으로 출전한 마지막 대회다. 그들은 첫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를 4-1로 완파했고, UAE와 콜롬비아를 가볍게 따돌렸으며, 16강 진출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며 결승에 올라 마라도나가 이끈 전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고 정상에 오른다. 4개월 후 이뤄질 독일 통일을 축하하기에는 더 이상의 선물도 없었으리라.

경기 전부터 장대비가 쏟아진 것이 이 날의 변수다. 체력이 강한 팀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감독 베켄바우어는 61경기 만에 처음으로 베스트 일레븐의 변화 없이 멤버를 꾸렸다. 이 대회를 석권하며 사상 두 번째로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을 품에 안은(첫 번째는 브라질의 자갈로) 이 남자가 얼마나 끊임없이 전술을 실험하며 섬세하게 작전을 입안하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경기 시작 후 5분, 서독은 골대도 한 번 맞추는 등, 결정적인 찬스를 세 번이나 놓쳤다. 34분까지 UAE가 단 한 번도 공격에 나서지 못할 만큼 일방적인 공세였다. 35분, UAE가 처음으로 서독 문전까지 전진하고 일트너 골키퍼가 공을 잠은 직후 시작된 연결에서 서독의 첫 골이 터졌다. 엷어진 수비망을 뚫고 상대 진영 오른쪽을 돌파하여 밀어준 볼을 뷜러가 문전에서 골키퍼와 수비수와 엉키며 밀어넣어 1-0. 1분 후 클린즈만의 노마크 헤드업이 반대편 골대를 맞고 들어가며 2-0.

후반들어 전열을 정비한 UAE는 기어이 월드컵 데뷔골을 터뜨린다. 하프라인 뒤쪽에서 대각선으로 길게 올려준 크로스가 원바운드로 서독 수비수의 키를 넘었고 이 공을 잡은 칼리드 이스마일 무바라크가 빠르고 정확한 대각선 땅볼슛으로 서독의 골망을 갈랐다. 일트너 골키퍼가 다이빙도 하지 못했을 만큼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경험이었다. UAE는 자기들의 페이스대로 경기를 운영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이 골을 허용한 후 서독은 첫 공격에서 곧바로 추가골을 터뜨린다. 불과 50초 만이었다. UAE는 서독의 파상공세로부터 이어진 슛을 막아냈지만 리바운드로부터 이어진 공을 마테우스가 비교적 자유로운 상황에서 강력한 중거리포로 마무리했다. 마지막 20분은 UAE 골키퍼의 5~6차례 몸을 던진 선방에도 불구하고 자책골을 포함한 두 번의 득점이 더 나왔다. 최종 스코어는 5-1로 서독의 승리.

UAE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는 6월 19일 볼로냐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와의 일전이었다. 전반 8분 만에 유고는 2-0을 만들었다. 전반 4분에 터진 수시크의 골은 90년 월드컵의 최단시간 득점 기록이다. 전반 중반 상대의 왼편을 돌파한 크로스를 받은 탄니 쥬마가 멋진 머리받기로 득점하며 1-2로 따라가며 희망의 불씨를 지폈지만, UAE는 더 이상 득점을 하지 못했다. 46분과 후반 추가시간의 연속 실점으로 스코어는 1-4. UAE의 모험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3패, 2득점 11실점이라는 초라한 기록이지만 UAE는 세계 축구계로부터 상찬을 받았다. 1990년 이탈리아 대회는 거친 파울과 극단적인 수비축구가 난무한 대회다. 열세인 팀이 아예 공격은 포기하고 전원수비로 버틴 경기가 많았다. 정상적으로 나서다 패하느니 무승부로 승점 1점을 가져오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월드컵 본선에 오를 정도의 경기력을 갖춘 팀이 마음먹고 극단적으로 수비만 하면 이를 뚫고 득점을 올리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예 찬스 자체가 거의 나지 않는 지루한 경기가 거듭된 이유다. 이탈리아 대회는 그래서 역대 평균득점이 가장 적은 역사상 가장 재미없는 월드컵이었다. 오죽하면 이 대회를 마치고 FIFA가 백패스 금지룰을 만들었겠는가. 단 한 팀, UAE만은 예외였다. 그들은 열린 축구(open football)을 했다. 극단적인 수비가 아니라, 정상적인 포메이션을 유지하며 상대팀과 맞섰다. 공격과 득점을 포기하고 전원수비로 90분을 버티는 재미없는 축구를 했더라면 UAE의 실점은 경기 당 1~2골 내외에 불과했을 터이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열세를 인정하고 당당한 자세로 플레이하며 요행을 바라지 않았다. 상대팀이 체력과 스피드를 앞세우며 많은 찬스를 만든 건 역설적으로 UAE가 정상적인 경기를 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아시아 예선부터 UAE는 아름다운 축구를 했다. 시간 끌기나 극단적인 잠그기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중동의 신사’라고 부른다. 딱 하나,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 75분 경, 카릴 가민 무바라크가 상대의 거친 플레이에 보복하다 퇴장당한(월드컵 역사상 50번째의 레드카드다.) 것이 UAE 선수들이 보여준, ‘신사답지 않은’ 유일한 행동이었다. UAE는 ‘축구는 이기려고 하는 것이지 비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격언을 피치에서 증명했다. UAE는 졌지만 명예로운 패자였다. 그들은 신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