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1년 만지케르트에서 동로마를 무찌른 셀축 튀르크는 기세등등하게 서진을 계속하였다. 셀축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야금야금 먹었고, 1085년에는 유서 깊은 안티오키아(Antiochia)를 점령하였다. 안티오키아는 우리나라 개신교에서 안디옥으로 주로 통하는 곳이다.
안티오키아가 어떤 곳인가. 예루살렘, 로마, 콘스탄티노플(새로운 로마, Nova Roma),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초기 그리스도교 5대 중심지 중 하나요, 교회사를 떠들썩하게 했던 테오토코스(Theotokos),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논쟁으로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 축출된 네스토리오스가 속했던 학파가 있던 곳이.
더욱이 콘스탄티노플 바로 코앞인 니케아(Nicaea, Νίκαια)도 셀축이 장악하고 셀축 룸술탄조(Anadolu Selçuklu Devleti) 수도로 삼았으니 동로마는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형국이었다. 룸(Rum)은 로마의 아랍어 표기로, 아나톨리아반도의 동로마 땅을 가리킨다.
콤네노스 동로마 황제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셀축의 위협 때문이었다. 이에 1096년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서 동로마 형제들을 돕고자 십자군을 보냈다. 제1차 십자군이다.
잠깐, 십자가 군대 하니 임진왜란 때 왜군 일진으로 조선을 침략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이 겹친다.예수회 세스페데스 신부가 종군신부로 동행했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은 십자가를 군기로 삼았다지.
제1차 십자군의 전과는 꽤나 짭짤했다. 무고한 시민들을 많이도 죽였고, 1099년에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다. 예루살렘 정복의 주인공인 십자군의 탄크레드(1075-1112, Tancred)는 주민 보호를 약속했지만, 군인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성내 무슬림과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예루살렘 내 그리스도인은 십자군이 포위를 시작하자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파티마조가 성 밖으로 모두 내쫓아서 없었다.
셀축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동로마 황제가 요청해서 시작한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셀렘을 정복하고 주변 지역을 접수하였지만, 셀축의 위협은 여전히 무시무시했다. 결국 1144년 에데사(Edessa)가 다시 셀축의 장군인 장기(1146년 죽음, Imad al-Din Zangi)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1187년 셀축, 아니 전 무슬림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살라훗딘에게 빼앗겼다. 살라훗딘은 이마둣딘 장기의 부하 장군이었던 시르쿠(Asad al-Din Shirkuh)의 조카다. 이제 에데사와 예루살렘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서유럽이 들썩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147년 제2차, 1189년 제3차 십자군이 출병하였지만, 에데사와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이었다.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한 제4차 십자군은 1198년에 교황이 된 이노켄티우스 3세(1198-1216년 재위, Innocentius III)가 즉위 직후부터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이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의 영적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유명한 데 1215년 라테란 공의회는 이노켄티우스의 업적을 집약하였다.
예루살렘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무슬림 세계의 중심이자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살라훗딘의 아유브(Ayyub)조를 무찌르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한 로마는 1202년 이집트를 치기 위한 제4차 십자군을 출병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럽의 왕들이 시큰둥했기에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가 북 치고 장구 치며 전쟁을 독려하였다. 유일하게 참가한 군주는 이탈리아의 몬트페라트(Montferrat) 왕 보니파치오 1세(1207년 죽음, Bonifacio I)였다. 이집트는 바다로 가는 것이 최적의 여정이었기 때문에 베네치아가 선박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보니파치오 1세의 형 꼬르라도(Corrado, Conrad)는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Isaakios II Angelos)의 여동생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1195년에 이사키오스 황제의 형이 이사키오스를 맹인으로 만들어 가두고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Alexios III Angelos) 황제가 되었다. *이사키오스는 이사악(Isaac)의 그리스어 표현임.
장님이 되어 퇴위 당한 이사키오스 황제의 아들 알렉시오스(아이고, 야도 알렉시오스, 디지긋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쳐 보니파치오 1세의 주군이었던 슈바벤(Schwaben, 오늘날 독일 남서부 지역) 왕 필립(1178-1208)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이 셋은 1201년 성탄절에 알렉시오스 3세 제거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집트로 떠나고자 베네치아(Venezia)에 모인 십자군은 베네치아와 계약을 맺은 인원수의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화가 난 베네치아는 대신 크로아티아의 자다르(Zadar)를 치는데 도움을 주면 빚을 탕감하겠다고 제안하였고, 십자군은 자다르를 점령하였다. 같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사는 도시를 정복한 것이다.
교황은 출정을 반대했지만 씨알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고, 이집트행이 무산될까봐 십자군의 만행을 사면하였다. 그런데 자다르에 머무는 동안 퇴위당한 황제의 아들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에게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를 제거해주면 동로마 교회를 로마교황청에 복속시키고 십자군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며 십자군과 함께 이집트 정복 길에 나서겠다고 솔깃한 제안을 하였다.
십자군은 행로를 이집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어 1203년 6월 23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는 줄행랑쳤고, 그 자리에 먼저 장님이 되어 강제퇴위 당한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와 함께 아들 알렉시오스가 엘렉시오스 4세로 등극하였으나 1204년 1월 둘 모두 궁정 쿠데타로 퇴위, 유폐된 후 사망하였다.
쿠데타 주도자 알렉시오스 두카스(Alexios Doukas, 야도 엘렉시오스, 미치긋다)가 알렉시오스 4세로 등극하여 십자군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204년 4월 12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역사에 오명으로 길이 남을 약탈, 살인, 강간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는 로마가톨릭 성당으로 바뀌었다.
동로마역사는 이 엄혹한 시절을 프랑크 지배기(Frankokratia, Φραγκοκρατία), 또는 라틴 지배기(Latinokratia, Λατινοκρατία)라고 부르고 있다. 베네치아가 지배한 곳은 베네치아 지배기(Benetokratia, Βενετοκρατία)라고 표현한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지배는 프랑크와 베네치아의 합작품인데, 1261년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Mikhael VIII Palaiologos)가 베네치아의 숙적 제노바(Genova)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십자군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하기아 소피아 성당도 정교회 전례를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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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년 만지케르트에서 동로마를 무찌른 셀축 튀르크는 기세등등하게 서진을 계속하였다. 셀축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야금야금 먹었고, 1085년에는 유서 깊은 안티오키아(Antiochia)를 점령하였다. 안티오키아는 우리나라 개신교에서 안디옥으로 주로 통하는 곳이다.
안티오키아가 어떤 곳인가. 예루살렘, 로마, 콘스탄티노플(새로운 로마, Nova Roma),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초기 그리스도교 5대 중심지 중 하나요, 교회사를 떠들썩하게 했던 테오토코스(Theotokos),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논쟁으로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 축출된 네스토리오스가 속했던 학파가 있던 곳이.
더욱이 콘스탄티노플 바로 코앞인 니케아(Nicaea, Νίκαια)도 셀축이 장악하고 셀축 룸술탄조(Anadolu Selçuklu Devleti) 수도로 삼았으니 동로마는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형국이었다. 룸(Rum)은 로마의 아랍어 표기로, 아나톨리아반도의 동로마 땅을 가리킨다.
콤네노스 동로마 황제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셀축의 위협 때문이었다. 이에 1096년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서 동로마 형제들을 돕고자 십자군을 보냈다. 제1차 십자군이다.
잠깐, 십자가 군대 하니 임진왜란 때 왜군 일진으로 조선을 침략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이 겹친다.예수회 세스페데스 신부가 종군신부로 동행했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은 십자가를 군기로 삼았다지.
제1차 십자군의 전과는 꽤나 짭짤했다. 무고한 시민들을 많이도 죽였고, 1099년에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다. 예루살렘 정복의 주인공인 십자군의 탄크레드(1075-1112, Tancred)는 주민 보호를 약속했지만, 군인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성내 무슬림과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예루살렘 내 그리스도인은 십자군이 포위를 시작하자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파티마조가 성 밖으로 모두 내쫓아서 없었다.
셀축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동로마 황제가 요청해서 시작한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셀렘을 정복하고 주변 지역을 접수하였지만, 셀축의 위협은 여전히 무시무시했다. 결국 1144년 에데사(Edessa)가 다시 셀축의 장군인 장기(1146년 죽음, Imad al-Din Zangi)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1187년 셀축, 아니 전 무슬림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살라훗딘에게 빼앗겼다. 살라훗딘은 이마둣딘 장기의 부하 장군이었던 시르쿠(Asad al-Din Shirkuh)의 조카다. 이제 에데사와 예루살렘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서유럽이 들썩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147년 제2차, 1189년 제3차 십자군이 출병하였지만, 에데사와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이었다.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한 제4차 십자군은 1198년에 교황이 된 이노켄티우스 3세(1198-1216년 재위, Innocentius III)가 즉위 직후부터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이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의 영적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유명한 데 1215년 라테란 공의회는 이노켄티우스의 업적을 집약하였다.
예루살렘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무슬림 세계의 중심이자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살라훗딘의 아유브(Ayyub)조를 무찌르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한 로마는 1202년 이집트를 치기 위한 제4차 십자군을 출병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럽의 왕들이 시큰둥했기에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가 북 치고 장구 치며 전쟁을 독려하였다. 유일하게 참가한 군주는 이탈리아의 몬트페라트(Montferrat) 왕 보니파치오 1세(1207년 죽음, Bonifacio I)였다. 이집트는 바다로 가는 것이 최적의 여정이었기 때문에 베네치아가 선박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보니파치오 1세의 형 꼬르라도(Corrado, Conrad)는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Isaakios II Angelos)의 여동생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1195년에 이사키오스 황제의 형이 이사키오스를 맹인으로 만들어 가두고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Alexios III Angelos) 황제가 되었다. *이사키오스는 이사악(Isaac)의 그리스어 표현임.
장님이 되어 퇴위 당한 이사키오스 황제의 아들 알렉시오스(아이고, 야도 알렉시오스, 디지긋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쳐 보니파치오 1세의 주군이었던 슈바벤(Schwaben, 오늘날 독일 남서부 지역) 왕 필립(1178-1208)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이 셋은 1201년 성탄절에 알렉시오스 3세 제거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집트로 떠나고자 베네치아(Venezia)에 모인 십자군은 베네치아와 계약을 맺은 인원수의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화가 난 베네치아는 대신 크로아티아의 자다르(Zadar)를 치는데 도움을 주면 빚을 탕감하겠다고 제안하였고, 십자군은 자다르를 점령하였다. 같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사는 도시를 정복한 것이다.
교황은 출정을 반대했지만 씨알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고, 이집트행이 무산될까봐 십자군의 만행을 사면하였다. 그런데 자다르에 머무는 동안 퇴위당한 황제의 아들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에게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를 제거해주면 동로마 교회를 로마교황청에 복속시키고 십자군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며 십자군과 함께 이집트 정복 길에 나서겠다고 솔깃한 제안을 하였다.
십자군은 행로를 이집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어 1203년 6월 23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는 줄행랑쳤고, 그 자리에 먼저 장님이 되어 강제퇴위 당한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와 함께 아들 알렉시오스가 엘렉시오스 4세로 등극하였으나 1204년 1월 둘 모두 궁정 쿠데타로 퇴위, 유폐된 후 사망하였다.
쿠데타 주도자 알렉시오스 두카스(Alexios Doukas, 야도 엘렉시오스, 미치긋다)가 알렉시오스 4세로 등극하여 십자군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204년 4월 12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역사에 오명으로 길이 남을 약탈, 살인, 강간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는 로마가톨릭 성당으로 바뀌었다.
동로마역사는 이 엄혹한 시절을 프랑크 지배기(Frankokratia, Φραγκοκρατία), 또는 라틴 지배기(Latinokratia, Λατινοκρατία)라고 부르고 있다. 베네치아가 지배한 곳은 베네치아 지배기(Benetokratia, Βενετοκρατία)라고 표현한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지배는 프랑크와 베네치아의 합작품인데, 1261년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Mikhael VIII Palaiologos)가 베네치아의 숙적 제노바(Genova)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십자군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하기아 소피아 성당도 정교회 전례를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