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칼람(Kalam) 9호 전쟁과 협력자들(박단)

시사 칼람(Kalam) 9호. 2021년 9월 8일 수요일  

(칼람은 아랍어로 말을 뜻합니다.)


전쟁과 협력자들


박단 유로메나연구소 소장



    


매일 2,000명을 오르내리는 코로나 확진자 뉴스, 약 6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 뉴스 못지않게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우리의 관심을 크게 끌고 있다. 탈레반의 ‘귀환’과 폭력, 협력자들 수송, 카불 공항 테러가 주로 국제적 이슈였다면, ‘미라클(Miracle)’작전 성공으로 국내에 도착한 390명의 아프가니스탄인 ‘특별기여자’ 문제는 이제 국내 현안으로 떠올랐다.


‘특별기여자’의 입국은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조치라고 우리 정부는 설명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미국의 대규모 협력자 수송 소식이 먼저 전해졌기에 ‘특별기여자’의 국내 이송에 크게 반발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갑자기 무슬림에게도 포용적인 인권 선진국이 되었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다. 특히 2018년 예멘 난민 문제에 비하면 너무도 조용해서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낯설기까지 하다.


우리 정부의 조처와 국민 대다수의 태도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정말 대단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토(NATO)군으로 참가했던 서구 선진국이 자국 군대에 협력한 사람들을 본국으로 데려가는 일에 처음부터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일단 프랑스의 사례만 보아도 그렇다. 나토 참전국으로 6만 명의 군인을 파견하였던 프랑스는 모두 89명의 사망자를 내고 2014년 군대를 철수했다. 2012년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사르코지(Nicolas Sarkozy) 당시 대통령과 올랑드(François Hollande) 사회당 후보 사이에 철군 문제가 경선에서 커다란 쟁점이 되었다. 사르코지는 2013년, 올랑드는 2012년 말까지 적어도 전투부대의 철군을 약속했다. 결국, 올랑드의 승리로 전투부대는 2012년 말에, 나머지 부대는 2014년에 완전히 철수했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에 협력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문제가 남았다. 프랑스는 2014년 철군 계획에 따라 이미 2011~2012년, 2015년, 2018~2019년에 협력자를 이송 조치하였지만, 여전히 프랑스로 데려가야 할 대상이 일부 남아 있는 상태였다. 2021년 8월 15일 카불이 탈레반에 함락되면서 미국과 함께 프랑스도 ‘현지 채용 민간고용인’을 모두 이송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미국, 독일 등이 인도적 차원에서 특별 이민 비자를 발급하는 방식으로 자국과 협력한 사람 대부분을 국내로 이송하는 가운데, 프랑스 정부 또한 프랑스 협력자를 모두 자국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뉴스가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프랑스 국방부 장관 파를리(Florence Parly)의 8월 28일자 트위터에 따르면, “대통령의 지시로 8월 15일 시작된 ‘아파간 작전(l’opération Apagan)’이 오늘 저녁 종료되었다. 2주 조금 안 된 시간에 프랑스군은 약 3천 명을 안전하게 보호 조치했다. 그 가운데 2,600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인을 프랑스에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받아들였을까? 파를리 국방부 장관의 말을 다시 인용해 설명하면, “222명의 현지 채용 민간고용인과 이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모두 800여 명이 이송되었다.” 나머지 사람 대부분은 아프가니스탄인이라기보다는 현지 프랑스 거류민(ressortissants)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게다가 프랑스로 이송된 아프가니스탄 사람 대부분은 통역관, 외교관, 의사, 요리사 등으로, 프랑스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들로 알려졌다.



2021년 4월 프랑스 국방부 보고서(Le rapport de la mission d’information sur les personnels civils du ministère des Armées)에 따르면, 1,067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프랑스 부대를 위해 일했고, 이중 무려 538명이 주로 카불 동쪽에 위치한 카피사(Kapissa)와 수로비(Surobi) 두 지역에 고용된 통역관이었다. 하지만, 8월 15일 이후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는 현지 채용 민간고용인 170명의 가족이 프랑스 정부에 비자를 요청한 상태이고, 그 가운데 33명만 프랑스 정부로부터 긍정적 답변을 받았다. 9월 1일자 프랑스 뉴스에 따르면, 여전히 민간고용인 100~150명의 가족이 카불에서 위험한 상황을 맞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비자발급 문제와는 관계가 없고, 카불의 복잡한 상황과 공항 접근이 어려워 출국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명하였다.


하지만 올해 1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에 따르면, 2021년 8월과 달리 2014년 철군 당시에는 프랑스 정부가 800여 명에 달하는 고용인 가운데 단지 220여 명만을, 그것도 여러 차례 나누어 난민으로 받아들였다. 이마저도 기꺼이 이들을 입국시킨 것이 아니고, 대부분 까다로운 절차를 밟게 했다. 프랑스는 처음부터 아무런 조건 없이 고용인 모두를 국내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협력자들에게 우선 퇴직위로금을 지급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재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현지에서 위협을 받는 사람들에게만 장기체류 비자를 발급하였을 뿐이다. 비자 발급기준에는 ‘위협을 받는 정도’, ‘프랑스군에 기여한 수준’도 있지만, ‘프랑스 사회에 동화하는 능력’ 또한 포함되었는데, 이는 곧 종교를 규제하려는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을 돕는 프랑스 변호사 단체에 따르면, 남아 있는 고용인과 가족은 탈레반으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필자에게는 알제리 전쟁(1954-1962) 후, 프랑스군에 협력했다가 새로운 알제리 독립 정부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당한 ‘하르키(Harki)’의 운명이 떠올랐다. 하르키는 아랍어로 “운동, 조직”을 뜻하는 ‘하라카(haraka)’에서 나온 형용명사로 조직원을 의미한다. 알제리의 하르키는 전쟁 중 프랑스군의 보충병으로 봉사하면서 동족 알제리인들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하르키는 분명 아프가니스탄의 민간협력자와는 다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현지 협력자의 상황을 보면 하르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830년부터 약 130년간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은 알제리는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적인 탈식민화 바람과 함께 1954년 11월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민족해방전선(FLN)>이라고 불린 알제리 독립군은 프랑스 정규군과 대항하여 약 8년을 싸웠고, 1962년 3월에 에비앙 협정을 맺어 전쟁을 종식하고, 7월 새로운 독립국가 알제리 인민민주공화국 건설에 성공했다. 하지만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67만 프랑스군인 중 9만 명이, 민족해방전선 병사 34만 명 가운데 15만 명이, 프랑스군 협력자 하르키 9만 명 가운데 3만 명 이상이 각각 사망했다.


전쟁 후 프랑스는 하르키를 어떻게 대우했을까? 하르키는 목숨을 담보로 프랑스군, 아니 프랑스를 위해서 싸우면서 동족을 총으로 쏠 뿐 아니라 고문과 밀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후 이들 가운데 약 4만 5천 명이 프랑스로 탈출하였다. 알제리 본토에 남은 하르키는 새로운 독립 정부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고문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이들의 부인과 딸 또한 강간당하고 처형당하는 등 엄청난 억압을 받았다.


그렇다면 프랑스에 정착한 하르키의 삶은 더 나았을까? 하르키는 프랑스 ‘귀국’ 초기 강제수용소에 머물러야 했다.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에도 하르키를 보는 프랑스인의 시선은 너무나 따가웠고, 경멸적이었다. 프랑스인이 보기에도 하르키는 “동족을 배신한 자들”이었다. 더욱이 하르키는 프랑스 사회에 동화될 수 없는 “무슬림”이었다. 하르키는 프랑스 통치하에서 ‘프랑스인’으로 교육받았고,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졌기에 ‘조국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막상 ‘조국 프랑스’에서는 차별받는 이방인이요, 2등 시민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와 알제리가 국교를 재수립한 후,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프랑스로 이주한 알제리인들이 구성한 ‘알제리 이주민공동체’에 자기 조국을 배신한 하르키는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하르키에 대한 프랑스 국가 차원의 보상도 오랫동안 무관심 속에서 미뤄졌다. 하르키와 이들의 후손은 ‘조국 프랑스’로 귀환한 후 약 40년에 걸쳐 시위, 단식투쟁, 정부 고소를 이어가며 투쟁을 벌인 결과, 마침내 2001년 9월 시라크 (Jacques Chirac)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국가를 위한 희생’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독립 알제리 정부는 여전히 하르키를 프랑스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에, 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방문하지도, 알제리에 남겨진 가족과 해후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아프가니스탄의 프랑스 협력자가 프랑스로 탈출하는 것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아마도 하르키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무슬림으로서 차별받을 것이고,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계속 장악하고 있는 한, 고향을 방문할 수도, 그곳에 남겨진 가족 혹은 친척을 쉽게 만날 수도 없을 것이다.


‘전쟁 협력자’의 삶은 고단하다. 프랑스에서 무슬림 협력자들의 삶은 더욱 고단할 것이다. 2017년 2월 16일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올린 선거 캠페인 영상에서, 하르키와 아프가니스탄 통역관을 비교하며 프랑스가 아프가니스탄 통역관을 즉시 난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잘못’을 인정했다.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했으니, 프랑스 사회가 아프가니스탄 협력자들을 조금은 덜 차별하지 않을까? 전망은 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