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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중동은 축구다] 북아프리카 축구의 문화사 6 –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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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전 숭실대 문창과 교수/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2019년 7월 현재, 이란 축구는 아시아 최강이다. 아시아 팀 가운데 FIFA 랭킹 21위로 아시아 정상이다. 아시아 2위가 일본으로 26위, 3위가 37위의 대한민국이다. 그 뒤로 오스트레일리아(41위), 카타르(55위), 아랍에미레이트(67위), 사우디아라비아(72위), 중국(74위), 이라크(76위), 시리아(83위) 까지가 ‘아시아 톱 10’이다.

이란이 아시아 팀 가운데 FIFA 랭킹이 가장 높다는 사실은 상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FIFA 랭킹은 월드컵 지역예선, 본선 조편성을 할 때 기본자료로 쓰인다. 예를 들어보자.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는 모두 46개국이 참가했다. 이중 상위랭커 34개국은 2차 예선에 바로 진출했다. 하위랭커 12개국은 홈 앤드 어웨이로 1차 예선을 펼쳐 승리한 6개국이 2차 예선에 진출했다. 한국 등 상위 팀들은 월드컵 지역 예선을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 다음 대회 탈락팀이 나온 것이다. 2차 예선은 40개국이 5개국씩 8조로 나뉘어 홈 앤드 어웨이로 격돌한다. 강한 팀끼리 한 조에서 부딪히는 것은 불공평하다. 승부의 진정성을 허무는 일이다. 그래서 상위랭커 8개국을 서로 한 조에 묶지 않는다. 랭킹 9~16위는 포트 2에, 17~24는 포트 3에 배정한다. 이때의 기준이 바로 FIFA 랭킹이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FIFA 랭킹이 단순한 자료 이상의 지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FIFA 랭킹은 최근 4년 간의 국제경기 성적을 반영하여 산정한다. 경기마다 배점이 다르다. 월드컵 본선이 가장 높고, 아시안 컵 등 타이틀이 걸린 대회가 그 다음으로 높다. 친선경기라도 경기장소가 홈이냐 어웨이냐 중립지역이냐, 상대 팀의 랭킹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점수 배정이 다르다. 타 대륙의 강팀과 어웨이 경기를 하고 승리하는 것이 최상이다. 친선경기라도 국제경기를 자주하면 FIFA 랭킹이 상승한다. 문제는 이란의 경우, 경제상황 및 국제정세의 영향으로 국제경기를 치르기가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상대를 찾지 못해 FIFA A매치데이를 허송한 적도 있다. 2014년 월드컵 직전에는 그리스와의 경기가, 2018년 월드컵 직후에는 브라질과의 경기가 이런 저런 이유로 취소된 적도 있다. 적어도, 이란 국가대표팀을 둘러싼 환경은 한국이나 일본, 호주에 비해서는 좋은 편이 아니다. 그래도 아시아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그래서 대단하다. 인정한다.

한국과의 역대전적도 13승 8무 9패로 이란의 우세다. 2011년 1월22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 8강전에서 연장전에 터진 윤빛가람의 파워풀한 중거리슛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한 것이 한국의 대 이란 전 마지막 승전보다. 그 이후로 한국은 이란을 이겨보지 못했다. 4번을 연달아 패하고 이후 두 번을 1-1로 비겼다. 최근 경기는 지난 6월 11일 상암동에서 벌어진 친선 경기. 황의조가 센스 만점의 발바닥 슛으로 득점하며 앞서 나갔지만, 자책골 불운으로 동점을 허용하며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두 나라 모두 아시아권 정상의 경기력을 가지고 있기에, 한국과 이란은 결정적 길목에서 자주 만난다. 1996년부터 2011년까지, 아시안컵 8강전에서만 무려 5번을 연달아 격돌했다. 1996년 8강전이 이란 팬들이 두고두고 추억하는 6-2 대승이다. 홍명보, 황선홍이 버티던 한국은 전반을 신태용(2018 월드컵 감독), 김도훈(현 울산 현대 감독)의 골로 2-1로 앞서 갔지만, 후반 연달아 5골을 허용하며 기록적인 대패를 당한다. 반대로, 이란에게 역대 최다점수차 패배를 안긴 팀도 한국이다. 1958년 5월 28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안게임 때 한국은 이란을 5-0으로 물리쳤다. 득점자는 이수남, 김영진, 문정식, 최정민, 우상권이다. 평안남도 출신으로 1.4 후퇴 때 남하, 1956년, 1960년 아시안컵 2연패 당시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아시아의 황금의 다리’라 불렸던 최정민(1930~1983)은 1978년 월드컵 에선 때 한국 감독이 되어 이란과 다시 만난다. 한국과 이란의 처절한 월드컵 지역예선 격돌사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한국은 1960년 이후 아시안컵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다음 대회가 2023년에 열리니 무려 63년 간 우승 기록이 없는 것이다. 역대 우승팀 중 최장기간 무승 기록이다. 역대 2위가 이란이다. 1968년(이란), 1972년(태국), 1976년(이란) 전무후무한 아시안컵 3연패를 달성한 이후 47년간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72년 5월 19일 방콕에서 열린 결승전 상대가 바로 한국이다. 48년 자바리의 선제골로 1-0, 65분 11번 이회택이 수비진 사이를 가르며 뛰어들어가는 탄력 그대로 오른발 슛을 성공시켜 1-1. 이란은 연장 후반 2분 칼라니의 득점으로 다시 우세를 점했고 2-1 그대로 승부를 마무리했다. 한국 대표팀의 9번 선수도 이 경기에 출전했다. 대학 1학년의 어린 청년이 대한민국 대표선수로 데뷔한 대회가 바로 1972년 아시안 컵이다. 1972년 5월 7일 조편성 경기는 0-0으로 끝났고,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그의 킥은 트랙을 넘어 장거리포처럼 비행하며 관중석까지 날아갔다. 말도 안되는 실축이었다. 청년은 그만큼 떨고 있었다. ‘에이스’ 11번 이회택은 ‘괜찮다. 기죽지 마라. 차고 싶은대로 차봐라. 30개, 40개 때리다 보면 한 두 골 안들어 가겠냐. 남들은 슈팅 찬스를 만들지도 못하는데 너는 얼마든지 찬스를 만들 수 있다’고 후배를 격려했다. 청년의 이름은 이제까지 아시아가 배출한 불세출의 축구선수, 차범근이다.

이란 축구 연맹(فدراسیون فوتبال ایران‎‎, FFIRI)은 이란의 축구 행정을 총괄하는 경기단체로, 1920년에 설립되었다. 첫 국제경기는 1941년에 가진 아프가니스탄과의 친선경기다. 1948년에는 FIFA, 1954년에는 AFC에 가입했지만, 월드컵 예선에는 1974년부터 출전했다. 이스라엘이 출전하는 한 아시아 예선에 출전할 수 없다며 1970년까지 중동 국가들은 아예 출전 신청 자체를 하지 않았다.

1974년 서독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에 참가한 나라는 15개국. 본선 참가팀 수가 16개국이던 시절이라 아시아-오세아니아에 배당된 티켓은 단 한 장. 이란은 시리아, 북한, 쿠웨이트와 묶인 1차 예선을 4승1무1패로 통과했지만 (1패는 4승1무로 다음 라운드 진출이 확정된 상황에서 시리아에게 0-1로 패배), 73년 8월 18일 호주와의 시드니 원정경기를 0-3으로 내주었다. 8월 24일에 열린 테헤란 홈경기를 2-0으로 이기기는 했지만, 단 한 골이 모자랐다. 월드컵 출전은 최종전에서 한국을 물리친 호주. (0-0, 2-2, 플레이오프 1-0승)

1978년 아시아 오세아니아에서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린 나라는 17개국, 참가권은 역시 단 한 장. 이란은 사우디, 시리아와의 1차 에선을 4승, 8득점 무실점의 깔끔한 기록으로 통과했다. 1977년 6월부터 12월까지 5개국이 홈앤드어웨이로 극동(한국, 홍콩) 중동(이란, 쿠웨이트), 대양주(호주)를 오가며 처절하게 격돌한 장기전의 승자는 6승2무, 12득점 3실점의 압도적 성적을 거둔 이란이었다. 지역예선 2위로 분루를 삼킨 나라가 3승4무1패의 한국. 이란의 2무승부는 모두 한국과의 경기에서 나왔다. 서울에서는 0-0으로 비겼고, 테헤란에서는 2-2로 비겼다. 테헤란 전 두 골의 득점자는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해체된 고양 자이크로 FC 감독을 역임했던 이영무다.

이란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시아 이슬람국가의 첫 월드컵 출전. 팔레비 국왕이 선수들을 따로 불러 공식 만찬을 함께하며 본선진출 포상금을지급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돌아오면 집, 자동차 등의 엄청난 포상을 약속했다. 이란이 내건 목표는 1970년 이스라엘의 2무1패, 1974년 호주의 1무2패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1978년 6월 3일, 멘도자에서 열린 네덜란드와의 데뷔전은 렌젠브링크에게 3골을 얻어맞으며(2골은 페널티킥) 0-3패. 네덜란드는 74년 준우승에 이어 이 대회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는 세계 정상권의 축구 강국이었다. 6월 7일, 콜로라도로 옮겨 치른 스코틀랜드와의 2차전. 이란은 데뷔전보다는 덜 허둥대며 경기를 치렀다. 43분 자책골로 리드를 내주었지만 종료 13분을 남기고 사상 첫 골을 기록하며 1-1 무승부, 첫 승점도 획득한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에이스는 역대 최고의 리버풀 FC 플레이어로 꼽히는 달그리쉬. 첫 경기를 페루에게 1-3으로 내준 스코틀랜드의 8강 꿈은 이란 전 1-1 무승부로 산산조각이 났다.

1무1패로 역시 탈락 확정이지만, 이만하면 체면은 세운 것이다. 골키퍼와 수비진의 신호가 맞지 않아 어이없게 실점을 하고서도 이란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반에는 찬스가 더 많았다. 팔레비 국왕은 선수단에게 직접 격려전화를 걸었다. 페르시아의 명예를 걸고 마지막 경기에서 최선을 다해 뛰어달라고 했다. 6월 11일 코르도바. 페루는 2분 만에 벨라스케스가 수비수의 방해를 받지 않고 뛰어오르며 헤드업으로 득점. 페루는 36분 37분 득점으로 3-0을 만들었고 이란은 38분 로우샨이 멋진 발리로 1-3으로 추격했다. 아시아 최고의 수문장 이란의 헤자지는 멋진 선방을 여러 차레 선보였지만 78분 두 번째 페널티킥을 막지 못해 1-4. 이란의 성적은 16개국 중 14위. 첫 출전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경기가 끝나고 이란팀 라커룸은 초상집처럼 변한다. 국왕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다. 4-1로 페루가 달아나는 순간 이란 벤치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감독이 무심코 빼든 담뱃불이었다. 축구 벤치 뿐만 아니라 기내흡연도 일반적이던 시절이다. 문제는 출국 직전 만찬에서 팔레비 국왕이 감독에게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 담배를 끊으라’고 조언했었다는 사실이다. 첫 두 경기는 명령을 따랐지만, 마지막 경기, 연이은 실점에 오래된 습관이 의식을 비집고 나온 것이다. 그때 감독의 주머니 속에는 왜 담배와 라이터가 있었던 것일까? 국왕은 TV로 생중계를 보고 있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국왕의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거액의 포상금은 담배연기와 함께 사라져갔다.

사라진 것은 포상금만이 아니다. 이란 축구 자체가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다. 1978년 2월에 시작되어 79년 4월에 나라 운영의 뼈대를 바꾼 이란혁명. 1982년 월드컵 예선에 절대강자 이란은 축구팀을 보내지 않았다. 1986년에는 이라크와의 전쟁(1980~1988)으로 실격. FIFA는 이란이 교전국이라는 이유로 홈경기의 제3국 개최를 명령했지만 이란은 이를 거부했다. FIFA는 선수단 안전을 이유로 이란의 출전권을 박탈했다.

이 시기에 국제경기에만 나설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국내리그도 중단되었다. 이란에는 1970년대 초 이전에는 공식적인 국내리그가 없었다. 연중리그가 없고, 짧은 기간 동안 지역별로 대회가 열리는 구조였다. 한국도 1983년 수퍼리그(K리그의 출범당시 명칭)가 생기 전까지는 연중리그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란의 경우, 이 시기의 강팀은 1960년대부터 절대 2강에 오른 타지와 페르세폴리스였다. 이 두 팀의 명성과 역사, 실력은 오늘날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이 시기에 테헤란 지역 리그는 꾸준히 개최되었다. 한국에서, 과거 거의 모든 전국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된 것과 비슷하다.

1973년에 이란 최초의 전국리그인 타흐트 잠쉬드 컵이 만들어졌다. 그 전에는 리그는 지역별 대회만, 전국 단위 대회는 토너먼트 대회만 존재했었다. 대회 때만 모여서 집중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즌 내내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타흐트 잠쉬드 컵은 어쩌면 아시아 최초의 프로리그일는지도 모른다. 이란 축구가 70년대 중후반 내내 압도적인 실력차로 아시아 다른 팀들을 물리친 것은 ‘연중리그’가 도입된 결과물이다. 타흐트 잠쉬드 컵에는 지방 팀들도 참가했다. 하지만, 테헤란 연고 팀들의 강세가 이어졌다. 이 리그는 1977-78 시즌 진행 도중에 이란 혁명이 발생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혁명 이후의 이란-이라크 전쟁도 축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국가와 국민이 예전만큼 축구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구단들의 재정이 어려워졌고, 축구를 후원하던 기업들이 사라졌다. 정치적인 이유가 겹쳐 많은 팀들이 구단명, 경영진, 스폰서를 바꾸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나라와 사회가 프로축구 연중 리그를 개최할만큼의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축구’가 재개된 것은 1년이 조금 지나서다. 하지만 1980년부터 1989년까지 국내리그나 전국대회는 열리지 않았고, 몇몇 도시에서 지역 별 토너먼트대회만 간간히, 그것도 비정기적으로 열릴 뿐이었다. 이란 축구가 시스템 복구에 나선 것은 1989년부터다. 코즈 리그 (Qods league)가 결성되어 테헤란 연고 팀들을 중심으로 연중리그를 펼쳤고 에스테글랄 테헤란이 우승했다. 1960년대부터 절대 강자였던 ‘타지’ 바로 그 팀이다. ‘타지’는 팔레비 왕의 왕관을 상징하는 명칭이니 혁명 후 그 이름을 구단 명칭으로 계속 사용하기는 부담스러웠을 터이다. 1986년 월드컵에서 숙적 이라크의 본선진출, 89년에 열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예선탈락, 시험적으로 시작한 코즈리그의 흥행 순항 등의 요인이 겹쳐 이란 축구협회는 전국단위의 세미프로리그 창설안을 마련한다. 1년 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탄생한 것이 1991년 막을 올린 아자데간 리그(ليگ آزادگان , Azadegan League)다. 첫 시즌은 1991-92시즌이었다. 무려 10여 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전국 규모의 축구리그다. 참가 팀 수는 매시즌마다 변화가 있었다. 파스 테헤란과 사이파가 처음 4년 동안 리그 타이틀을 번갈아 주고 받았고, 이 두 팀은 1990년대 초반에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컵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는 페르세폴리스와 에스테글랄 테헤란의 양강 구도가 펼쳐졌다.

FIFA에서 세계 축구리그 10대 더비 매치로 꼽힌 테헤란 더비가 있다. 바로 페르세폴리스와 에스테글랄 테헤란이 맞붙는 경기다. 두 팀다 테헤란이 연고지이며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자디 스타디움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에스테그랄과 페르세폴리스 FC가 맞붙는 이 더비는 매번 이란군(경찰이 아니다!)이 출동하며 경비를 설 정도로 엄청난 이벤트다. 매번 10만에 가까운 관중들이 각자가 붉은색(페르세폴리스)와 푸른색(에스테그랄) 경기복을 입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다. 군이 경기장 응원석을 반으로 갈라 응원단이 섞이는 것을 막는다. 그래서 항공사진에는 관중석을 정확히 반으로 가른 붉은 물결과 푸른 물결이 넘실거린다. 이렇게 당국이 안전문제에 신경을 쓰는데도 경기 결과를 두고 자주 싸움이 벌어진다. 이란판 훌리건들 때문에 이란 정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다. 최근 성적은 페르세폴리스가 좀 더 앞서있다. 2016-17 시즌부터 3연패에 성공했다. 에스테그랄의 최근 우승기록은 2012-13 시즌이 마지막이다.

아자데간 리그는 2001-02 시즌에 명실상부한 프로 축구 리그로 개편되었다. 모든 선수들이 다른 직업이나 부업을 하지 않고 축구에만 전념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리그의 명칭도 이란 프로 리그(لیگ برتر فوتبال ایران , Iranian Pro League)로 바꾸었고, 완전한 프로구단으로 전환하지 않은 팀들은 아자데간 리그에 남았다. 자연스럽게, 아자데간 리그가 이란 프로리그의 2부 리그가 되었다. 2006-07 시즌부터는 리그의 명칭을 페르시안 걸프 컵으로 바꾸었고, 2014년에는 페르시안 걸프 프로 리그로 다시 타이틀 명을 변경했다. 페르시안 걸프 프로리그는 2019년 7월 현재 중국, 카타르, 한국, 일본에 이어 아시아 클럽 컴프티션 랭킹 5위다.

다시 월드컵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1994년 월드컵은 2승3패의 성적으로 최종예선 탈락. 최종예선 첫 경기 한국에게 0-3으로 진 것이 끝까지 결정타였다. 1998년은 이란이 20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복귀한 감격적인 대회다. 하지만 본선으로 가는 길은 엄청나게 험난했다. 시리아, 키르기스스탄, 몰디브와 엮인 1차 예선은 5승1무 39득점 3실점의 압도적인 기록으로 통과. 몰디브와의 어웨이 경기에서 무려 17-0 으로 승리했고, 1무는 5연승으로 다음 라운드 진출을 확정한 뒤 시리아와 홈에서 2-2로 비긴 것이다. 최종예선은 사우디, 중국, 카타르, 쿠웨이트와 A조에 편성. 이란은 중국을 4-2(a), 4-1(h)로 연파하는 등 3승2무로 조 선두를 달렸지만 마지막 세 경기를 1무2패(사우디 0-1(a), 쿠웨이트 0-0(h), 카타르 0-2(a))로 추락하며 3승3무2패로 일정을 마친다. A조의 승자는 마지막 세 경기를 2승1무로 장식한 4승2무2패의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A조 승자인 사우디와 B조 승자인 차범근 호 한국은 본선에 직행했다. 남은 한자리 본선행 티켓을 걸고 1997년 11월 16일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 벌인 일본과의 단판 승부. 이란은 연장전 끝에 2-3으로 석패했다. 일본이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오르는 감격의 현장에서 이란 선수들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대륙간 플레이오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32개 출전국 중 31개 팀이 확정된 가운데 마지막 남은 1장의 티켓을 놓고 오세아니아 1위 호주와 맞붙은 운명의 일전. 승리를 한다면 호주는 1974년 후 처음, 이란은 1978년 후 처음으로 본선에 오르는 상황이었다. 여담이지만, 74년과 78년 아시아 2위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11월 22일 테헤란 홈경기는 1-1 무승부. 1주일 후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에서의 최종전에서 호주는 32분, 48분에 득점을 올리며 2-0으로 앞서 나갔다. 프랑스 행 티켓이 거의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할 즈음, 이란이 만회골을 터뜨렸다. 76분이었다. 4분 후 이란은 기어이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2-2로 경기를 마무리한다. 원정경기 다득점 원칙에 따라 간발의 차로 본선행 확정. 1차 예선, 2차 예선, 플레이오프, 대륙간 플레이오프 등 무려 17경기를 치르고서야 확정한 본선행. 이란은 본선 참가국 중 가장 많은 예선경기를 치른 나라라는 기록을 세우며 본선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본선 성적은 1승2패로 조별리그 탈락. 유고슬라비아와 독일에 0-1, 0-2로 패했지만 본선 무대 사상 첫 승을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6월 21일 리옹에서 맞붙은 상대는 미국. 리옹은 6월 13일 또 다른 아시아 대표 한국이 멕시코에게 1-3으로 덜미를 잡힌 경기장이었다. 경기 외적인 상황 때문에 화제를 모았던 이 경기에서 이란은 미국을 2-1로 물리친다. 경기 전 이란 감독이 미국 벤치를 찾아 악수를 청하자, 미국 감독이 깜짝 놀라 일어나며 서로 예의를 갖추는 장면이 전 세계 언론의 화제를 모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도 고난의 여정이었다. 2차 예선 최종전을 바레인에게 1-3으로 패하며 4승3무1패로 5승2무1패의 사우디아라비아에 밀리며 플레이오프 행. UAE를 1-0, 3-0으로 연파하고 했지만 대륙간 플레이오프 최종전에 진출했지만 아일랜드에게 0-2, 1-0으로 득실차에서 밀리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예선은 2차예선을 5승1패로 통과, 최종예선은 4승1무1패로 일본에 이어 조2위로 본선에 직행했다. 본선 결과는 멕시코, 포루투갈에 1-3, 0-2로 패하고 앙골라와 1-1로 비기며 예선탈락. 2010년에는 최종예선에서 한국 때문에 울었다. 최종예선에 한 조롤 묶인 팀은 한국, 북한, 이란, 사우디, UAE. 이란과의 최종전을 앞둔 한국은 이미 4승3무로 본선 진출을 확정한 상황. 2009년 6월 17일 상암경기장에서 벌어진 최종전. 이란은 51분 쇼자에이의 선제골로 앞서나갔지만 81분 연속 육탄태클을 돌파한 박지성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1-1로 비긴다. 역시 1-1로 비긴 2월 11일 테헤란 경기에서의 한국 득점 시간과 득점자도 81분의 박지성이었다. 그때는 머리로, 이 경기에서는 발로 골을 넣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이 경기 결과. 조2위로 본선에 오른 팀은 3승2무2패, 승점 11점 7득점 5실점의 북한. 역시 3승2무2패, 8득점 8실점의 사우디가 플레이오프로 진출했고 이란은 2승4무1패, 승점 10점으로 탈락했다. 이란이 1-0으로 승리했다면 3승3무1패 승점 12점으로 북한 대신 이란이 본선에 나갔을 터였다.

이 시기가 이란 축구의 변곡점이다. 2011년 이란 축구협회는 포루투갈 출신의 케이로스 감독을 사령탑에 앉혔다. 1953년생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수석코치, UAE, 남아공, 포루투갈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명장이었다. 케이로스는 남북단일팀이 출전한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홈팀 포르투갈 감독을 맡아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코리아와의 일전을 1-0으로 승리한 인물이다. 2019년까지 장기간 재임하며 케이로스는 이란 축구를 한 단계 끌어 올렸다. 이기는 축구가 아니라, 지지 않는 축구를 도입했다. 체력을 바탕으로 공세적으로 나서는 축구로는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럽에 비해 선수층이 얇고, 가용자원이 많지 않기에 선택한 전술이다.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경기장에 드러누우며 시간을 끄는 이른바 ‘침대축구’도 케이로스 재임기에 한 단계 더 진화했다. 2014년 브라질 최종예선에서 이란은 5승1무2패 조 1위로 본선에 직행했다. 한국과의 두 경기를 모두 1-0으로 이겼다. 한국은 우즈케키스탄과 4승2무2패 동률을 기록했지만 골득실차에서 단 한 골이 앞서 가까스로 본선에 합류했다.

6월 16일 쿠리치바에서 만난 이란의 첫 상대는 나이지리아. 경기는 0-으로 득점 없이 끝났고 양팀 모두 찬스 자체가 많지 않았다. 대회 첫 무득점 경기이며 그때까지 펼쳐진 경기 중 가장 재미없는 경기라는 평을 들었다. 이란은 월드컵 출전 사상 최초로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6월 21일 아르헨티나 전의 작전은 ‘텐백(ten back)’으로 불린 전원수비. 나이지리아 전과는 달리, 이 경기는 강팀 대 약팀의 경기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명경기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기 전만 하더라도, 이란이 또다시 90분 내내 수비를 하고, 아르헨티나가 일방적으로 몰아칠 것이라는 예상이 대다수였다. 전반전은 모두의 예상대로였다. 이란은 아예 공격시도를 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골문을 지켰다. 아르헨티나의 슛은 이란의 수비를 효과적으로 공략하지 못했고, 유효 슛도 거의 날리지 못했다. 후반전에 접어들며 초조해진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중거리슛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고 이란이 공세로 나왔다. 아르헨티나가 체력적으로 한 발 물러선 후반 20분 이후, 이란은 서너 번의 결정적 찬스를 만들었다. 수비의 롱볼 연결을 받은 소수정예의 공격진이 특공대처럼 아르헨티나 문전을 위협했다. 아르헨티나는 세르히오 로메로의 골키퍼의 연이은 선방 덕에 실점을 면했다. 후반전의 유효슈팅 숫자는 오히려 이란이 더 많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후반 추가 시간에 터진, 메시의 드리블에 이은 중거리 슛. 이란은 9명이 페널티박스 안, 1명이 페널티 박스 바로 바깥에 있을 정도로 수비대형을 갖추고 있었지만, ‘천재’의 왼발슛은 정확하게 이란 골키퍼 오른편 아래쪽 구석을 파고 들었다. 이 경기 유일의 메시의 유효슈팅.

남은 2분을 아르헨티나는 침대축구로 복수하며 승리를 지킨다. 결승골 직후 마지막 선수교체를 할 때 앙헬 디 마리아가 느긋하게 걸어나오며 양말을 세 번이나 걷어올리고 40여 초를 소모한다. 경기 후 케이로스 감독은 "메시를 막지 못했다, 이 골이 그가 천재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심판과 메시만 아니었더라도 우리의 승리였다"고 아쉬워했다.

이란은 공격을 아예 포기하고 ‘영혼의 텐백’을 구사한 전반전은 찬스를 주지도 않고 만들지도 못하며 0-0으로 버텼지만, 상대가 지친 후반전 후반부에 공세를 펼치다 결국 골을 내주었다. 세계축구계는 이 경기 이후 이란의 전략을 ‘약팀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 가운데 하나’로 인정했다. 무엇보다도 수비력이 뛰어났고, 역습 상황에서 보여준 공격력도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경기다. 수비만 하라고 하면 선수들은 아무래도 맥이 풀리기 마련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이 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란은 모든 선수들이 그 산황을 헌신적으로 감내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영혼의 텐 백’, ‘알라의 방패’다.

6월25일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의 상대는 2패로 이미 탈락이 확정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이란은 승리하면 16강 진출도 바라볼 수 있는 처지였지만 1-3으로 패하며 짐을 싼다. 이 경기는 이란 축구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판에 축약해 보여주었다는 의미가 있다. '영혼의 텐백' 전술은 ‘지면 탈락’인 토너먼트, 혹은 압도적 강팀을 만나 버틸 수 밖에 없을 때는 매우 효과적이다. 하지만 나이지라아처럼 상대도 신중하게 나오는 경우에는 별다른 공격무기가 없다. 애초에 모든 공격이 ‘역습’을 전제로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술의 근본적 문제가 여기에 있다. 리그에서는 승점을 많이 챙기기 어려워 자력 통과가 쉽지 않다. 1위나 2위를 차지하려면 상대 팀 간 경기 결과에 기대야 한다.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 직전 이란은 대한민국을 이기지 못하면 탈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최종전이 이란의 1-0 승리가 아니라 0-0 혹은 1-1로 끝났다면 이란은 우즈베키스탄에 다득점에서 밀려서 탈락햇을 것이다.) 이란은 최종예선을 5승1무2패로 마쳤지만, 득점은 8골에 불과했다. 실점 역시 단 2골에 불과했지만.(한국은 13득점, 7실점. 우즈벡은 11득점, 6실점) 케이로스 감독이 한국 벤치를 상대로 도발한 이른바 ‘주먹감자’ 사건은 그래서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의도적인 퍼포먼스일 가능성이 크다. 대한민국 전국민을 상대로 도발하여 한국팀이 공세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이란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월드컵에서는 나이지리아가 보스니아에 승리하면서 계획이 어긋났고, 이란의 16강 진출 꿈은 이번에도 불발로 끝났다.

2018년 최종 예선에서 이란은 한국과 ‘또’ 만났다. 양팀 대결의 결과는 1승1무(1-0승, 0-0 무승부) 이란의 승리. 이란은 6승4무로, 홈경기 4승1무, 어웨이 경기 2무3패의 널뛰기 성적을 거둔 한국이 조2위로 본선에 올랐다.

두 번째 경기는 카잔(한국이 독일을 2-0으로 물리친 곳)에서 가진 스페인과의 경기. 이란은 스페인의 공격에 맞서 효과적으로 버텼지만 54분 코스타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다. 코스타의 의지가 100% 작용한 슛이 아니라는 점이 불운했다. 이란 수비 둘과 코스타가 서로 뛰어가며 몸이 엉킨 상황에서 수비가 걷어낸 공이 코스타의 정강이에 맞고 이란 골문 쪽으로 강한 슛처럼 뻗어나갔다. 7분 후 이란은 동점골을 넣었지만 VAR 판독에 의해 오프사이드로 판명. 최종 스코어는 이란의 0-1 패배.

1승1패의 성적으로 마주한 조별리그 마지막 상대는 호나우두가 버틴 1승1무의 포루투갈이었다. 45분 포루투갈의 득점으로 1-0. 비기거나 지면 탈락인 이란은 이때부터 공세로 전환했다. 포루투갈은 리드한 상황에서 VAR 판정으로 후반 5분 페널티킥을 얻었지만, 호나우드의 슛이 골키퍼에게 막히며 승리를 굳힐 기회를 날렸다. 90+3분, 역시 VAR 판정에 이은 이란의 페널티킥은 카림 안사리파르드가 확신에 찬 킥으로 오른쪽 상단으로 강타를 날려보내 1-1을 만들었다. 종료 직전 메흐디 타레미의 왼발슛은 포루투갈 골문 옆그물을 때렸다. 이 슛이 들어갔더라면 16강 진출국은 포루투갈이 아니라 이란이었을 터이다. 1승1무1패, 2득점 2실점으로 다시 조별리그 탈락. 5번의 도전에서 이란은 단 한 번도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월드컵 조별리그 통과라는 이란 축구의 비원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이란 축구는 이란을 둘러싼 국제환경이 개선되면 비약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국내 사정이 국제관례와 다소 차이가 있다는 문제는 여전히 경기 외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된 후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베테랑 마수드 쇼자에이와 에산 하지사피가 이란 축구협회로부터 중징계를 받았다. 그리스 클럽 파니오니오스에서 활약하고 있는 두 선수는 2017년 8월 3일 2017-2018 UEFA 유로파리그 3차 예선 2라운드에 출전했다. 상대는 이스라엘 클럽 마카비 텔 아비브. 두 선수에게 내려진 징계는 국가대표 영구 퇴출, 사유는 적성국과의 경기에 출전한 것이었다. 두 선수는 이스라엘과의 원정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란 국적이라 이스라엘 정부가 비자 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란 축구협회가 이 점을 지적하고 두 선수에 대한 징계를 철회함으로써 사태는 봉합되었지만, 그 이전에 케이로스 감독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FIFA가 ‘정부의 축구개입’을 이유로 이란의 월드컵 참가자격 박탈을 검토하는 등 사태는 한동안 심각하게 흘렀었다.

축구는 다른 면에서도 이란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다. 2018년 10월 16일,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란과 볼리비아 축구 대표팀과의 친선경기에 여성 관중의 입장했다. 1981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4개월 전인 2018년 6월 러시아 월드컵 대회 때 아자디 스타디움에 여성 축구팬이 입장했던 적은 있다. 하지만 이때는 실제 경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방송을 보는 단체 응원전이었다. 월드컵 전부터 이란의 여성들은 ‘애국심에는 남녀가 없다’는 구호로 당국을 압박했다. 그리고 경기장 내 직접 관전이라는 결과물을 얻어냈다.

그렇다. 이란 축구는 이란 사회를 통합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며 국제화를 선도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 이란에서 축구는 축구 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