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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중동은 축구다] 북아프리카 축구의 문화사 4 – 사우디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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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전 숭실대 문창과 교수/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사우디아라비아는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아시아 축구의 최강자였다. 1976년 프로리그를 시작한 뒤 막대한 투자를 통해 아시아를 넘어섰다. 그 정점이 1994년 월드컵 16강 진출이다. 사우디는 북한의 1966년 이탈리아 전 1-0 승리 이후 28년 만에 월드컵에서 승리한 아시아 팀, 아랍 및 중동국가 사상 최초의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모로코라는 난적의 숲을 돌파하며 거둔 업적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성취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있다. 쉬운 길을 버리고 정공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다른 중동 국가들 중 어떤 나라는 타지역, 예컨대 북 아프리카 유망주를 귀화시키는 방법으로 축구대표팀의 전력을 끌어올렸다. 사우디도 이런 전략을 취할 수 있는 자금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집스럽게 자국 유소년 선수들을 육성하는 방법으로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사람들의 물적 인적 교류가 이전 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증가한 현대에 ‘귀화를 통한 전력 강화’는 더 이상 흠이 아니다. FIFA 규정도 선수들의 ‘축구 국적’을 유연하게 적용한다. 반드시 법적인 국적을 따르지 않아도 무방하다. 국가대항전에 나서는 선수는 본인의 출생지, 자란 곳, 부모님의 국적, 조부모님의 국적 가운데 본인이 원하는 나라를 선택할 수 있다. 단, FIFA 주관 대회의 예선이나 본선에 출전한 뒤에는 나라가 흡수합병되거나 멸망하지 않는 한 축구 국적을 바꿀 수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70~80년대를 관통한 사우디의 전략은 여전히 칭찬의 대상이다. 표면적인 결과에만 매달리지 않고, 시스템 자체를 구축하여 축구산업의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말을 요약하면, ‘소모적 전략’이 아니라 ‘생산적 전략’을 골랐다는 뜻이다.
1950년대 말 창립한 사우디 축구협회는 1976년 전국리그를 결성하며 최초로 연중리그를 실시한다. 대회 때만 모여 단기전으로 승자를 가리는 방식이 아니라, 시즌 내내 1주일에 1~2경기를 정기적으로 치르는 유럽식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선수들의 몸관리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면서 대표팀 수준도 전체적으로 급상승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거둔 첫 번째 성과는 1984년 LA 올림픽 출전이다. 변변한 프로리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아시아에서 올림픽 출전이 월드컵 다음의 권위를 인정받던 시절이다. 모든 올림픽 예선이 명실상부한 국가대표 A매치였고, 각국은 사활을 걸고 올림픽 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시아에 배당된 출전권은 3장. 승자는 무조건 올림픽에 나가는 최종예선전 준결승에서 사우디가 만난 상대는 그해 6월 U20 세계 4강에 빛나는 한국이었다. 사우디는 한국의 정해원에게 원더골을 얻어맞는 등 0-2로 끌려갔지만 좌초하지 않았다. 쫓고 쫓기며 뒤집고 뒤집히며 무려 9골을 주고받은 난타전의 승자는 사우디. 최종스코어는 5-4였다. 이듬해 올림픽 본선에서 사우디는 브라질, 모로코, 서독에게 3패, 1득점 10실점의 초라한 성적으로 물러났지만, 같은 해 또 다른 승전보를 고국에 타전한다.
1984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안컵. 사상 최초로 본선 무대를 밟은 사우디는 첫 경기 한국 전을 종료직전의 동점골에 힘입어 1-1로 마무리한다. 4경기 2승2무 4득점 2실점의 경제적인 축구로 4강 진출. 준결승에서 이란에게 0-1로 끌려가다 88분 득점으로 1-1을 만든 뒤 연장에 이어 승부차기로 결승행. 수비를 단단히 하고 매 경기 1득점으로 승리, 혹은 무승부로 항해하던 사우디는 결승에서 중국을 2-0으로 물리치며 ‘첫 출전 첫 우승’의 신화를 쓴다. 4년 후에 열린 다음 대회인 88년의 결승 상대는 한국. 개최국은 카타르, 결승전이 열린 도시는 도하였다. 뒤에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축구 역사에서 잊지 못할 일들이 일어난 곳이다. 5연승의 한국이 ‘우세 예상‘팀이었지만 사우디는 연장 포함 120분을 0-0으로 버티고 승부차기 끝에 대회 2연패에 성공한다. 연장전에서 팔을 다친 한국의 조광래는 오른팔을 붕대로 싸매고 몸에 고정한 뒤 최종 수비수로 내려서서 끝까지 분투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승부를 한국 쪽으로 가져가지는 못했다. 이후 사우디는 84년부터 2000년까지 아시안컵 5연속 결승진출, 3회 우승이라는 훌륭한 성적표를 남긴다.
이 시기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룩한 또 다른 업적이 있다. 1989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U17 월드컵이다. 이 대회는 동독이 마지막으로 참가한 FIFA 주관 대회이기도 하다. 사우디는 첫 경기에서 포루투갈에게 0-2로 끌려갔지만 끈질기게 따라붙어 2-2로 비겼다. 당시 포루투갈의 주장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주장을 맡았던 피구다. 2차전 기니아 전도 2-2 무승부. 조별리그 콜롬비아와의 마지막 경기를 알 로와이히의 2경기 연속 득점에 힘입어 1-0 승리한 사우디는 조2위로 8강에 올랐다. 나이지리아와 0-0 무승부 후 승부차기로 4강. 중동 나라끼리 펼친 4강전 바레인 전은 샛별 알 로와이히의 결승골로 1-0 승리. 결승전의 상대는 홈팀 스코틀랜드였다. 7분, 25분에 골을 먹고 끌려가던 사우디는 전반 종반의 위기 상황을 몸으로 막으며 겨우겨우 버텨낸 후 후반들어 공세를 개시했다. 49분, 65분의 득점으로 2-2. 이후는 사우디가 판을 주도했지만 양 팀 모두 추가 득점을 올리지는 못했다. 승부차기 끝에 5-4의 스코어로 우승컵을 들어올린 팀은 사우디아라비아. 아시아 팀이 FIFA가 주관하는 남자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처럼 아시아권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상하리만치 월드컵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늘 최종예선에 오르고 본선참가 일보직전에서 무너지는 일이 이어졌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의 개최국은 카타르. 1986년까지 아시아지역 월드컵 예선은 다른 대륙과 상이점이 있었다. 홈앤드어웨이가 원칙이었지만 1차 예선의 경우 한 나라에 모여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AFC는 각국의 이동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 효율적인 일정 잡기가 어렵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1990년, 94년에는 최종예선을 한 나라에 모여 풀리그로 진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FIFA의 결정으로 1998년부터는 1차 예선부터 모든 월드컵 예선 경기가 홈앤드어웨이로 열린다.)
첫 경기에서 사우디는 종료 직전의 동점골로 한국과 1-1로 비긴다. 이후로는 매 경기 난전을 거듭했다. 94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은 참가팀 6개국의 전력이 거의 비슷했던 탓에 서로 물고 물리는 초접전 양상이 마지막까지 이어진 역대급 혼전이다. 모든 팀이 단 한 경기만을 남겨놓은 시점에서의 상황을 살펴보자. 아시아에 배당된 출전권은 2장이었다.
1위: 일본 승점 5점 2승1무1패 5득점 2실점 +3
2위: 사우디 승점 5점 1승3무 4득점 3실점 +1
3위: 대한민국 승점 4점 1승2무1패 6득점 4실점 +2
4위: 이라크 승점 4점 1승2무1패 7득점 7실점 0
5위: 이란 승점 4점 2승2패 5득점 7실점 –2
6위: 북한 승점 2점 1승3패 5득점 9실점 –4
승리는 2점, 무승부는 1점이 주어지던 시절이다. 6위 북한만 탈락 확정이고, 1~5위팀 모두가 다른 경기 결과에 따라 본선진출이 가능한 눈 터지는 계가 바둑. 일본과 사우디는 이기면 무조건 본선에 나가는 살짝 유리한 처지였지만, 무승부나 패배는 탈락을 의미했기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최종 매치업은
사우디아라비아 대 이란,
한국 대 북한,
일본 대 이라크.
공정을 기하기 위해 세 경기 모두 같은 시각에 킥오프.
사우디아라비아가 21분, 27분 사미 알 자베르, 파하드 알 무할랄의 득점으로 달아나자 이란은 43분 메흐디 포노니자데의 통렬한 중거리포로 추격해왔다. 47분 만수르 알 모우사가 득점에 성공하며 3-1, 사우디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이 눈앞에 다가온 듯 했으나 이란은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53분 메흐디가 다시 20여 미터 중거리포를 터뜨리며 3-2로 다시 따라왔다. 피차 간 살떨리는 찬스를 주고 받으며 처절하게 이어지던 공방전은 74분 함자 플라이티의 골로 사실상의 승부가 갈렸다. 종료 직전 이란의 만회골이 터졌지만 4-3으로 사우디의 승리. 사우디의 본선행 확정과 이란의 탈락. 만약 경기가 3-3이나 4-4로 끝났다면 사우디와 이란이 동반 탈락하고, 한국과 일본이 본선 무대에 올랐을 것이다. 사우디나 이란이나,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이유다.
다른 경기에서 한국이 북한을 3-0으로 물리쳤다. 경기가 끝난 시점에서의 나머지 경기 스코어는 일본 2 이라크 1.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아시아의 출전권은 월드컵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사우디와 일본의 차지였다. 하지만, 스포츠의 묘미는 ’10초 후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 아니던가. 한국 대 북한의 경기 종료 후 30초가 지난 시점, 이라크가 최후의 터치를 헤드업 동점골로 성공시키며 2-2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득점자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전방까지 달려갔던 수비수 움란 자파르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이 승점 6점 동점, 골득실차에서 일본을 간발의 차로 앞서며 막차로 본선행 기차에 오른 ’도하의 기적‘이다. 일본은 ’도하의 참극‘이라 기억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도하의 감격‘으로 되새기는, 아시아 축구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어느 저녁의 풍경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난리가 났다. 선수단 전용기가 뜨고, 국왕이 하사하는 벤츠 승용차와 주택이 귀국 전부터 모든 선수와 코칭스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우디가 세계를 놀라게 한 건 그 다음이다. 본선 조 추첨 결과는 F조 네덜란드, 벨기에,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의 조합. 6개조의 3위 팀 가운데 상위 4팀이 16강에 오르는 ’24개국 체제‘였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예상 성적은 모로코에 이은 조 최하위였다. 하지만 89년 17세 이하 대회 우승멤버 7명이 포진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쉽게 무너지는 팀이 아니었다.
1994년 6월 20일 워싱턴 D.C. 사우디의 월드컵 데뷔전 상대는 레이카르트, 드 보어, 베르캄프, 로이, 반 데 사르 등 전 유럽리그 베스트급 선수들을 다수 보유한 절대강자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 감독이 딕 아드보카트, 2006년 월드컵 대한민국의 사령탑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전반 10분까지는 네덜란드의 일방적 공세. 월드컵 처녀출전의 중압감에 시달리던 사우디는 전반 9분 처음으로 상대 진영으로 공을 보냈고 11분에 첫 찬스를 만들며 수세에서 벗어났다. 마침내 18분 사우디가 네덜란드 진영 오른편에서 프리킥을 얻었다. 수비진의 머리 위를 딱 공 두 개만큼만 더 높이 비행하며 휘어지던 공을 향해 솟아오른 사우디의 첫 점프와 네덜란드의 방어 점프는 모두 공에 머리를 대지 못하고 통과. 첫 점프의 바로 뒤에서 배구의 시간차 공격처럼 솟아오른 아민의 헤드업이 골키퍼 왼편 구석을 꿰뚫으며 역사적인 사우디의 월드컵 첫 득점을 만들었다. 리드 이후에도 사우디는 물러서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며 대등하고 당당하며 아름다운 축구를 했다. 양 팀 모두 1~2차례의 득점 기회가 있었다. 사우디가 2-0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까? 후반 초인 49분 네덜란드의 용크가 아크 바깥 골대 정면에서 중거리포를 터뜨리며 1-1. 양 팀 모두 공격적인 플레이가 이어지던 86분, 사우디의 치명적인 실수가 나왔다. 선방을 거듭하던 알 데야예 골키퍼가 상대의 크로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허공에다 헛손질을 했고, 그대로 오른편으로 흐른 볼을 타우먼트가 텅 빈 골문을 향해 원바운드 장거리 헤드업으로 밀어 넣으며 2-1을 만들었다. 졌지만 명예로운, 그러나 안타까운 패전이었다.
다음 경기는 25일 뉴욕에서 열린 모로코와의 경기다. 이슬람 국가끼리 맞붙은 사상 최초의 월드컵 본선 경기다. 사우디는 7분 페널티 골로 앞서갔고 26분 모로코의 반격으로 1-1. 46분 후아드 아민의 중거리 슛은 강하고 낮기는 했지만 골대 정면으로 비행했다. 수비진에 막혀 순간적으로 시야를 뺏긴 모로코의 골키퍼 카릴 아즈미가 첫 스텝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다시 공 쪽을로 다이빙했지만, 아민의 슛은 힘으로 아즈미의 손을 뚫고 그물을 출렁였다. 2-1로 사우디의 리드.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 스코어에는 변동이 없었다. 사우디의 월드컵 사상 첫 승이자 66년 북한의 이탈리아 전 1-0 승리에 이은 아시아 축구의 2번째 승전보다. 경기 후 주장 모함마드 압둘자와드가 “오늘은 모든 아랍인들에게 기쁜 날입니다.”라고 인터뷰한 것도 화제를 모았다. 1961년 팬 아랍경기에서 모로코가 사우디를 13-1로 물리친 일(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최다실점 패배)에 대한 복수의 일침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6월 29일 조별리그 최종전 사우디의 두 경기 모두 1-0으로 이기고 2연승 조선두인 상승의 벨기에, 장소는 워싱턴 D.C. 였다. 전반 6분 벨기에의 공격패스를 끊은 수비수의 패스가 오와이란의 발에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얼마 동안 전 세계의 축구팬들을 황홀경에 빠뜨린,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자기 진영부터 벨기에 수비수 6명의 저지선을 돌파하며 리드미컬한 질주로 벨기에 문전까지 진격한 오와이란이 아름다운 오른발 마무리로 득점에 성공하며 1-0! 전 세계 축구계가 오와이란을 ’사막의 마라도나‘라 부르며 환호했다. 월드컵 역사 상 가장 아름다운 골 10선에 늘 이름을 올리는 역대급 명장면이다. FIFA의 공식 보고서는 오와이란이 질주한 거리를 컴퓨터로 실측했다. 직선거리가 아닌, 초반에 작은 원을 그리며 수비수를 따돌리는 등, 오와이란이 실제 질주한 거리를 측정한 결과는 69미터. 그 먼 거리를 오와이란은 혼자서 달려 득점을 올린 것이다. 그가 질풍처럼 내달리는 동안, 어느 누구도 공에 발끝조차 갖다 대지 못했다. 2승1패 조 2위로 16강 진출. 아시아 팀이 본선에서 2승을 거둔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다음 경기 스웨덴 전을 1-3으로 패하며 8강에 오르지 못하고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월드컵 데뷔전은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보다 고급의 승용차와 포상금이었다. 역시 국왕의 하사품이었다. 안타깝게도, ’사막의 마라도나‘는 이후에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자국 선수들의 해외리그 진출을 막는 규정에 묶여 유럽 여러 구단의 스카우트 제의에 응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본인 스스로가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가는 곳마다 ’그 골‘ 이야기를 하며 그가 가는 곳 어디서나 ’그 골‘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오와이란 스스로가 ’나중에는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월드컵 2년 후 감옥에 가고 은퇴 후에는 심각한 교통사고를 내는 등, ’사막의 마라도나‘는 개인적 방황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본인에게는 심리적 압박감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족쇄였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골은 여전히 세계 축구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전설적인 한 방 불멸의 예술작품‘이다. 1998년, 2002년, 2006년, 2018년 월드컵에서 기대에 다소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올렸지만, 사우디 축구는 1994년의 업적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예언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초록색 매(The Green Falcon)는 언젠가는 사막을 넘어, 1994년의 업적 이상으로 다시 한 번 힘차게 날아오를 것이다.